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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슈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 과정과 배경 원인 본문

역사 이슈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사변 과정과 배경 원인

펙트콜 2019. 1. 22. 16:20

안녕하세요.  <비이슈>역사 입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의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야만적이고 잔인한 사건을 일으킵니다.


"을미년에 일어난 변"이라고 해서 "을미사변"이라 부르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이유 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은 자신들의 힘으로 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게 됩니다.


일본도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고 대륙으로 진출할 기회를 찾던 중이라 군대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동학 농민 운동"이 진정 국면으로 전환되었지만 일본은 조선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조선에 친일 내각을 세우고 청나라와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청나라와 일본은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많은 배상금과 랴오등 반도 그리고 타이완 펑후 섬 등을 넘겨받게 되었지만 일본 세력이 커가는 것을 꺼리던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 등과 힘을 모아 청나라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라고 일본을 압박하고 결국 일본은 넘겨주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명성황후"는 당시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조선 내각에 "친러파"를 중용하게 됩니다.


명성황후(1851년~1895년)는 성은 민"閔"씨이며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16세에 고종(26대 왕)의 비로 간택되었으며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를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은 "명성황후" 때문이며 또한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도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명성황후 국장 행렬>


을미년"乙未年" 1895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의 군인들과 낭인 깡패 등은 조선의 궁궐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시해합니다.


이후 일본은 증거를 없애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흥선대원군과 궁궐 수비대가 벌인 일이라고 진실을 왜곡하기 시작했지만 러시아인과 미국인 등의 목격자가 나타나면서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사건의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로 압송하여 형식적인 재판을 열어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하게 됩니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에서 친일파 중심으로 내각이 결성되었으며 일명 을미개혁이라고 불리는 서양식 의복 착용과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고 특히 단발령 등의 강요로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고 또한 을미사변의 진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 의병"義兵"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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