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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슈

정묘호란 병자호란 배경과 인조 삼전도의 굴욕 본문

역사 이슈

정묘호란 병자호란 배경과 인조 삼전도의 굴욕

펙트콜 2019. 1. 28. 17:58

안녕하세요. <비이슈>역사 이슈입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으로 광해군(15대 왕 재위:1608~1623)을 몰아내고 인조(16대 왕 재위 1623~1649)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인조반정의 배경에는 "대북파"의 지지로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던 "서인"들의 세력이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인"들은 광해군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자 지속적으로 불만은 증폭되었습니다.


이때 "명나라"와 "후금"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어려워진 조선의 사정을 생각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정책으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당시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대군을 제거했고 선조의 아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기도 했습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광해(이병헌)


"서인"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과의 의리를 배신하고 또한 패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을 옹립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당연히 인조반정의 원인이었던 중립 정책을 버리고 "명나라"와는 화친을 "후금"과는 대립하는 "반금친명"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이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고(이괄의 난:1624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잔당들이 후금으로 피신해 "인조"의 왕위 계승은 잘못된 것이며 또한 조선을 침략할 좋은 시기라고 부추기게 됩니다.


자신들과 대립하는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침략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후금"은 이와 같은 명분으로 1627년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묘호란(1627년)입니다.


영화 <남한산성> 인조(박해일)


"후금"은 군사 3만을 조선에 보내 침입했는데 당시 조선은 전쟁을 치를만한 여력이 없었고 파죽지세로 밀렸으며 "인조"도 강화도로 피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금"도 당시 명나라와 대립하고 있던 시기라 계속 조선을 공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강화 협상으로 "형제 관계"를 맺고 물러납니다.


하지만 "후금"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요구하였습니다.


영화 <남한산성>


또한 "정묘호란"때 약속한 조공 등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 등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것이 병자호(1636년)입니다.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청나라는 조선을 거침없이 공략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을 피신하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 왕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의 신하의 나라가 되었고 또한 많은 재물과 함께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조선 17대 왕 효종)"등을 청에 인질로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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