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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슈

이하응 흥선대원군 가계도와 업적과 비판 본문

역사 이슈

이하응 흥선대원군 가계도와 업적과 비판

펙트콜 2019. 1. 25. 17:15

안녕하세요.  <비이슈>역사이슈입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高宗"(재위 1863~1907)의 아버지로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섭정을 시작하면서 조선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인물입니다.


철종(25대 왕 재위 1849~1863)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권이 더욱 약해졌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절정에 달하면서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하지만 "안동김씨"는 멈추지 않고 왕실을 통제하고 위협하는 수준까지 오르게 되면서 자신들과 뜻이 맞지 않는 왕족은 누명을 씌우거나 귀향을 보내는 일까지 하게 됩니다.


이하응(흥선대원군 본명)은 "영조(21대 왕)"의 현손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왕족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안동김씨"의 표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하응"은 이러한 것을 미리 예측하고 일부로 건달처럼 생활하며 전혀 왕권에 대한 야망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안동김씨" 가문에 찾아가 구걸을 하는 등의 모습까지 보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철종"이 후사도 없는 가운데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이하응"은 "안동김씨"에게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궁중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趙大妃"에게 접근하게 됩니다.


"조대비"에게 신임을 얻은 "이하응"은 "철종"이 만약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의 둘째 아들 이명복(고종)을 왕위에 올리자고 설득했고 서로의 뜻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철종"이 1863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조대비"는 "이항응"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후사로 지목하고 그렇게 "이하응"의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영화 <명당> 흥선대원군(지성)


"고종"이 즉위하면서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왕의 아버지로 권력의 중심에서 안동김씨의 세력을 몰아냈지만 국정의 공백을 막기 위해서 일부의 안동김씨 세력과는 손을 잡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양반들의 세력 확장의 기반이었으며 국가 재정의 낭비와 붕당의 원인으로 지목된 "서원(사림들이 지방에 세운 사립학교)"을 47개만 남기고 과감히 정리하였고 당파와 관계없이 많은 인재를 등용하는 등 봉건적 개혁정책을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당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었고 왕실의 권위를 위해 경복궁을 무리하게 새로 지으면서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흥선대원군(유준상)


또한 "흥선대원군"의 끊임없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조선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고종"이 왕비"명성황후"와 함께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을 규합하면서 결국 정계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정계복귀를 노리며 명성황후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고 조선의 정세는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잠시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다시 친러파가 정권을 잡자 "흥선대원군"은 양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1898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드라마 배역 이미지로 본 흥선대원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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