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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슈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원인과 배경 본문

역사 이슈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원인과 배경

펙트콜 2019. 2. 20. 15:26

안녕하세요.  <비이슈>역사 입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고종 19년인 1882년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입니다.


당시 조선은 개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을 우대하였고 상대적으로 "구식군대"는 차별을 받았습니다.


"구식군대"는 월급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13개월 만에 봉급으로 받은 쌀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 있어 그동안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구식 군대"는 고지기(창고를 관리하던 사람)을 폭행하고 관리인 "민겸호"의 자택으로 쳐들어갔으며 또한 일본 공사관 그리고 궁궐을 습격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임오군란이 대규모로 확산된 배경에는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명성황후 세력(민씨 일가)"이 정권을 독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무리한 개화 정책으로 더욱더 살기 어려워진 하층민의 백성들이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명성황후 추정 이미지)


궁궐까지 쳐들어온 구식군대를 피해 "명성황후"은 극적으로 피신했고 두려웠던 "고종"은 민씨 세력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났던 자신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선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명성황후" 세력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청나라 병력 3000여 명이 개입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으로 청으로 압송했습니다.


<흥선대원군>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이 심해졌으며 또한 일본도 공사관 침입을 이유로 배상과 함께 일본 군대도 조선에 머무르게 할 것을 요구하며 "제물포 조약"을 맺었습니다.


고종 19년인 1882년 8월 30일 일본과 맺은 "제물포 조약"은 일본의 야심을 드러낸 불평등 조약으로 당시 힘이 없었던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요구 조건 대부분을 수용했습니다.


임오군란은 수습되면서 조선에는 다시 명성황후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분열되기 시작했고 또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동시에 주둔하면서 조선은 겉잡을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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